장미차를 마시며
정끝별
시 쓰는 후배가 인도에서 사왔다며 건넨 장미차
보랏빛 마른 장미들이 오글오글 도사리고 있다
잔뜩 오므린 봉오리를 감싸고 있는 건 연두 꽃판이다
아홉번을 다녀갔어도 후배의 연애는 봉오리째
차마 열리지 못했는데, 그게 늘 쓴맛이었는데
찻물에 마른 장미 아홉 송이를 띄운다
여름 직전 첫 봉오리가 품었던 목마름은
오랜 물에도 좀체 녹아들지 못하고
보라 꽃잎에서 우러나온 첫물은 연둣빛이다
피워보지 못한 것들의 무연한 숨결
첫물은 그 향기만을 마신다
아홉에 한 송이쯤은 어쩌다 활짝
따뜻한 물에서 꽃피기도 하는데
인도밖에 갈 곳이 없었던 후배의 안간힘도
그렇게 무연히 피어났으면 싶었는데
붉게 피려던 순간 봉오리째 봉인해버린
보랏빛까지 다 우려내고도 결코 열리지 않는
물먹은 숱한 꽃봉오리들
적막히 입에 넣고 씹어본다
보랏빛 멍을 향기로 남기는 제 몸 맛처럼
안으로 말린 모든 꽃이 쓰리라
채 피우지 못한 꽃일수록 그리 떫으리라
정끝별 『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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