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

농사일지13

고재종




반쯤 산그늘에 가려

항상 쭉정이 절반인 산답 닷마지기

다랭이 다랭이 쟁기로 갈아

모내기를 마쳤소 누님


몸져 고단한 저녁

잠시 논두렁에 나앉으니

망종 지난 달빛 어느새 푸르러

심아놓은 어린 모들

지극히 몸 틀어 뿌리잡는 모습 훤하고

사방에선 개굴개굴

뒷산에선 밤뻐꾸기 울어

어머니 끙끙 돌아앉는 소리가

온 들에 가득 퍼집니다


저 못난 논배미 열번을 갈아봐야

도입소 쳐서 걸머진 축협빚

안 쓸래야 안 쓸 수 없는 농자금에

어디 어림턱이나 하고

누님께 부칠 쌀 한 말이나

남저지 있으려나 모르지만

그래도 농부 사는 일이라

빈 논 그냥 묵혀둘 순 없었소


그까짓 다 집어치우고

리어커나 한 대 사 들고

푸성귀장사라도 하게 올라오라고

누님은 막말 같은 성화지만

그러나 칠십평생 굽어굽어

땅으로 굽으신 아버지는

죽어도 주검 묻어줄

고향에서 죽겠다시니 누님

저조차 끝내 눈시울 적셔오는

저 앞들 뒷들이 정겹소

저 앞산 뒷산이 정겹소


어머니 아버지 한평생

허기를 끄시던 두렁마다

이 저녁 저렇게 맑은 이슬이 내리고

그 이슬에 젖은 우북한 풀들

달빛 받아 더욱 뒤척이고

심어놓은 어린 모는 더욱

잔 바람에 흔들거리니


어쩜 축협빚 더한

막내 공납금 댄 사채도

농자금 아니라 치곗돈 아니라

형님 제금날 때 꾼 복리돈조차도

되려 비현실처럼 멀고

영등포 리어커장사 더한

영동의 휘황한 술장사라도 그만

부럽지 않소 누님


아무렴요 펄펄 살아 있는 목숨

설령 저나마의 논뙈기

하루아침에 모두 날려버릴지라도

산 입에 거미줄 칠 수는 없을 것


끝내 안되면 삽자루 꼬나들고

달려갈 곳으로 달려갈지라도

내일은 또 윗뜸

형순양반에게 얻어놓은

여시골 묵정밭이라도 일구어

이모작 참깨씨라도 뿌려볼 셈이니

아버지 벌떡 일어서시며

이제 그만 내려가자는 말씀도

저렇듯 청청한 저녁


어느새 달빛은 희망처럼 부풀어

우리의 지친 귀가길을

환히 밝히오 누님.



고재종 『새벽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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